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88 서울 올림픽 (문단 편집) == 기타 == * '''동독과 소련이 [[독일 재통일]]과 [[소련 해체]] 전 마지막'''으로 참여한 올림픽 경기이다.[* 소련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공산권 동유럽의 국가들도 모두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는 마지막으로 참여한 올림픽이었다.] * 일제의 강제 징용 등으로 [[소련]]으로 넘어갔다가 살게 되었던 [[사할린]] 동포들이 소련 측 선수단의 통역관이 되어 몇십 년 만에 고향을 방문해 혈육들과 재회한 일들도 [[https://imnews.imbc.com/replay/1988/nwdesk/article/1814266_29513.html|화제가]] [[https://news.joins.com/article/2272173|되었다.]] * 다이빙 종목 우승자인 그렉 루가니스는 당시 [[AIDS]] 보균자였다. 그는 다이빙 시합 도중 머리를 보드에 부딪혀 피를 흘렸는데, 이 당시 응급처치를 위해 의사가 별 보호장치 없이 그대로 그를 치료했다. 훗날 그가 AIDS 보균을 고백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AIDS 약도 당시 가지고 다녔는데, 대한민국을 떠나 출국할 때, 검역장에서 걸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지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하니 공항에서 검역을 면제해 줬다고. 훗날 루가니스는 공식적으로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했고 [[LGBT]] 운동가로 활동 중이다. 참고로 루가니스를 키워낸 코치가 바로 [[한국계 미국인]]이자 올림픽 영웅 [[새미 리]]. * 부대행사처럼 여겨지던 [[패럴림픽|장애인 올림픽]]이 비로소 기틀을 잡은 것이 바로 서울 대회였다. 이때부터 장애인 올림픽이 비로소 올림픽의 곁가지가 아니라 장애인들의 체육 행사로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에, 서울 장애인 올림픽은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실제 서울 장애인 올림픽의 심볼 마크가 그대로 국제 장애인 올림픽 기구의 심볼로 [[1994년]]까지 쓰였으며, 그 이후 모양은 바뀌었으나 태극 무늬는 2004년까지 심볼 모양에 남아있었다. * 1988 서울 올림픽의 대한민국 선수단 유니폼은 대한민국 의상 디자이너계의 거장으로 유명했던 [[앙드레 김]]이 디자인을 했다. 하늘색 재킷과 흰색 바지/스커트 형식이다. 여기에 소품으로 태극선(태극 무늬의 둥근 부채)을 접목했다. * 서울 올림픽도 흑자를 봤는데, 순수 입장 수입으로 인한 흑자보다는 올림픽 복권 수입 및 선수촌 아파트 분양을 통해 적자를 메우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올림픽 개최로 인한 경제적 이득은 약 4,300억 원으로 알려져 있다. *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 파견된 공무원, 기업체 직원들은 막상 올림픽이 끝난 후에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이미 그들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서 일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고 그들을 실업자로 만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나서서 서울올림픽 기념사업 목적으로 설립한 새로운 [[공공기관]]이 바로 [[국민체육진흥공단]]이다. 인적자원을 올림픽 조직위에서 그대로 승계받았다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체육진흥공단에서는 지금도 그 전신을 올림픽 조직위로 삼고 있으며 정식 명칭도 '서울올림픽기념'국민체육진흥공단이다. * 1989년에 [[북한]] 측은 서울 올림픽을 쫓아가려고 [[북한/경제/역사/1980년대의 대규모 정책 실패#s-3.2|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평양시|평양]]에서 개최했으나, 엄청난 비용 부담 때문에 경제난으로 이어져 훗날 [[북한/경제/역사/1980년대의 대규모 정책 실패|1980년대 북한의 3대 실정]] 중 하나로 손꼽힌다. * 소련 올림픽 농구 대표팀은 당시 아마추어인데도 세계 최강으로 인정받던 미국 농구 올림픽 대표팀[* 당시 해군 의무 복무 때문에 NBA 진출이 늦춰졌던 [[데이비드 로빈슨]]이 속해 있었다.]을 준결승에서 꺾고 결승에서도 승리해 [[금메달]]을 획득했다. 패배에 충격받은 미국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프로농구([[NBA]]) 스타 선수들을 총출동시켜 우승을 차지한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소련 농구팀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해 소련 농구팀에게 설욕은 하지 못했지만 이때부터 미국 농구 대표팀은 '[[드림팀]]'으로 불리게 된다. 이것 때문에 1992년과 1988년 남자농구는 1~3위가 뒤바뀌었다. 1988년에는 소련, 유고슬라비아, 미국 순서였는데, 1992년엔 미국, [[유고슬라비아]]의 후신 중 하나인 [[크로아티아]], 소련의 후신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가 나란히 1, 2, 3위를 차지했다. 이것은 한국의 명절인 추석과 설이 라마단 등의 명절과 달리 종교적 의미가 없어서 경기진행 및 시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영미권 PC주의 국가들에서 공부하는 아시아계 유학생들이 추석이나 설 등의 명절을 이유로 데드라인 연기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호주나 캐나다 등에서 추석이나 설은 쉬는 날이 아니고 따라서 데드라인이 이 기간에 올 수 있는데, 아시아계 학생들이 문화다양성을 주장하며 민족명절에는 숙제를 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세계 농구 역사로 보자면,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 NBA 스카우터들이 주목했던 소련, 유고슬라비아 출신 선수들이 큰 활약을 남긴 대회로 역사에 남겼다. * 금메달을 땄던 소련 대표팀의 주전들 중 4명이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소련령 리투아니아 공화국]] [[카우나스]]의 강호 농구팀 'BC 잘기리스' 소속이었으며, 그 넷은 리투아니아 독립 후 조국의 농구계 발전에 공헌하거나 정계 진출을 하기도 했다. 특히 당대 세계구급 최고의 센터로 이름났던 [[아비다스 사보니스]]가 팀의 에이스로 뛰었고, 동료였던 사루나스 마르셜오니스는 1989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입단하여 리투아니아인 선수로서는 최초로 NBA 무대를 밟았다. 그러나 그 4명은 리투아니아인 입장으로서 점령국인 소련의 국기를 달고 뛰었기에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834469#cb|아쉬운 측면이 있었고]], 4년 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비로소 독립국 자격으로 출전했지만 동메달에 그쳤다. *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는 훗날 1990년대 초중반 NBA 스타가 된 [[드라젠 페트로비치]], [[토니 쿠코치]], [[블라디 디박|블라디 디바치]] 등이 뛰었다. * 당시 소련 대표팀의 기수는 그 유명한 '''[[알렉산더 카렐린]]'''이었다. * 남자 200m 배영 메달 수여식에서 장내 아나운서의 실수가 있었다. 당시 금메달 수상자는 [[소련]]의 이고리 폴랸스키 선수였고, 한국어와 프랑스어로는 소련의 국가가 연주된다고 정확히 고지되었지만 영어 아나운서가 뉴질랜드의 국가가 연주된다고 실수해버린 것.[* 그래도 해설만 잘못되었을 뿐이지 실제로는 [[소련 국가|소련의 국가]]가 제대로 연주되었다.] 동메달 수상자인 [[뉴질랜드]] 선수와 은메달 수상자인 [[동독]] 선수가 폭소를 터뜨리는 와중에 정작 묵묵히 서있는 소련 선수의 표정이 [[https://www.youtube.com/watch?v=k0CPo0sWCPs|압권이다.]] * 당시에는 소련, 헝가리,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공산권과 외교 관계 자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해당 국가의 선수 및 관광객 등이 올림픽 기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본국과 접촉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올림픽 기간 한정으로 공산권에서 한국에 외교관 혹은 연락관(attaché)을 파견하여 자국민 보호 업무를 맡았는데, 소련의 경우 개막 1개월 전에 영사급 외교관들이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뒤[* 이들의 입국 [[비자]]는 [[일본]]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발급되었다.] 올림픽 폐막 후인 10월 10일까지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 머무르면서 소련 선수단과 관광객을 위한 영사 업무를 진행했으며[* 물론 소련인들의 영사 업무만 진행했을 뿐,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소련 접촉은 일체 받지 않았다.] 헝가리 등의 다른 동유럽 공산 국가는 올림픽 선수단에 속한 연락관이 부영사 지위를 부여받아 영사 업무를 봤다. * 이 당시 [[미국]]에 대한 [[반미|한국 국민들의 반감]]은 의외로 심했는데, 안 그래도 미국 정부에서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노태우]] 당선에 대해 대놓고 축하 논평을 낸 것과[*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76981|KBS]],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9666_19322.html|MBC]] 미국정부, 노태우 대통령 당선 축하논평] 경상수지 적자가 벌어진다면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식의 간섭, 일방적인 영화시장 개방, 미국정부의 노골적인 정경유착 및 내정간섭 등에 시달린 데다, 서울 올림픽 직전 주한미군 자녀가 임산부를 폭행하고 주한미군 병사가 택시 기사를 폭행하는 등의 사건 사고가 터졌고, 개회식 입장에서 미국 선수들이 카메라에 대고 술취한 눈빛으로 욕설을 한다던지, 트랙을 벗어나 이상한 곳으로 걸어가는 등의 기행을 선보였고, 거기에다 올림픽 방영권을 지니고 있는 미국 [[NBC(미국 방송)|NBC]] 방송이 올림픽 기간 내내 집창촌이나 미군 PX 물품 유출같은 한국의 부정적인 면만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보도를 일삼았다. 거기에 변정일 사건이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로 일방적으로 편파 중계를 했고, 거기에 미국 선수 일부의 태극기 모욕, 그리고 미국 수영선수단의 절도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NBC와 미국 선수들의 병크에 국민들은 "미국이 한국을 아직도 후진국으로 생각하면서 내리깔고 무시한다!!"고 분노했고, 안하무인격인 [[미국]]에 대한 비난(혐미)여론이 급속히 증폭되었다. 거기에다가 이 상황에서도 NBC 제작진이 대한민국과 변정일을 비웃는 티셔츠의 제작을 문의하는 일까지 알려지자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미국과 소련의 남자 농구 준결승전에서 [[대한민국]] 관중들이 [[소련]]을 응원하는 사태까지 가 버렸다. 그제서야 심각성을 깨달은 [[미국]]은 급히 한국인 달래기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정부]]와 정치권에서 무분별한 반미감정은 한미관계에 도움이 안된다면서 자제에 나서달라고 부탁했으며 미국 선수단이 폐회식 때 한국을 달래주는 제스쳐를 취하면서 겨우 무마되었다. 그러나 NBC는 30년 뒤 한국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평창 올림픽 개최 국가를 '[[북한|North Korea]]'으로 오기하며 또 크게 사고를 쳤다. 다만 첨언하자면 미국과의 경기 당시 운동권이 해당 분위기를 조장했다는 증언이 있다. 황순원의 손자이자 당시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황성준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과 소련의 농구 경기가 치러질 때 자신이 현장 지휘하는 운동권 인원을 대거 투입해서 현장에서 소련팀을 응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그것이 성공하여 일방적인 소련 응원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실제로 황성준은 그 후 소련팀 응원이라는 사건을 자기 성과로 상부에 보고한 소련 측 요원의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하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소련에 몇 년간 체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A_tYf5Y2Oyo|증언 영상]] 하지만 어찌 되었든, 운동권 외의 일반인들도 응원에 참가했던 만큼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소련이 불참한 명목상의 이유가 '선수들의 안전'이었기 때문에 정부가 소련을 올림픽에 참여하라고 설득하기로 결정한 이후 언론은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KAL 007기 격추 사건]]을 보도하지 못했다. 올림픽이 코앞이던 1988년 9월 1일은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이 일어난지 5년이 지났으나, 언론은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소련]]이 [[북한]]을 버리고 올림픽 참가를 결정하면서 남북한의 체제 경쟁에서 남한이 승리했음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은 운동권 학생들도 많았다. 특히 정통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민중민주주의|PD]]계열이 그러했는데, 사실상 이때와 이후 진행된 동구권 몰락과 더불어 PD계열이 약화되었다. [[김문수]], [[이재오]] 등의 PD 출신 보수 정당 정치인들이 사민주의를 거쳐 우파로 전향한 것도 이때쯤. 결정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남자 농구 준결승전에서 한국인들이 일방적으로 소련을 응원하는 모습은 사회적으로 미국의 의미와 소련의 의미에 대한 고찰을 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소련인들은 멘붕하였고 "우리도 저 나라처럼 해보자" 하고 마음 먹고 옐친을 뽑았다가 '''신나게 말아먹고 말았다.''' * 위 내용과 더불어 당시 소련 대표팀은 놀랍게도 엄청난 응원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아직 냉전이 끝나지 않았던데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과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까지 있었는데도[* 이 사건 직후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 대한민국은 다음 대회 개최국이었음에도 불참했다.] '''일본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받았다.''' 이 당시는 [[일본 문화 개방]]도 되지 않았고, 반일 감정 또한 컸을 때임을 감안해야 한다. * 당시 공산권 국가들은 적극적인 체육 선수 육성을 통해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제법 선전한 편이었는데, 이 대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장 여자 기계체조 단체전에서는 '''[[소련]]'''이 금메달을 따내면서 [[소련 국가]]가 연주되고 소련 선수 일부가 이를 대놓고 제창한 것도 모자라, 은메달과 동메달마저 각각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과 [[동독]]'''이 차지해서 '''유럽 공산권 3개국의 국기가 대한민국의 경기장에 휘날리는 풍경이 펼쳐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l7lAZ89Pu_c|#]] 물론 정치와 스포츠는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 올림픽 정신인데다, [[1976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무려 12년만에 공산권과 서방권이 한 자리에 모여서 '''당대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 치러진만큼 당시의 대한민국 정부나 국민이나 공산권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념하고, 서울 올림픽의 평화와 동서 화합의 정신을 살린다는 취지 아래 [[서울평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초기 수상자들은 완전 엉망이었다. 오늘날에는 좀 잠잠했지만, 수상 초기에는 정말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수상 재단도 내분에 시달렸다. IOC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가 있질 않나... 2020년에는 또 IOC 위원장 [[토마스 바흐]]에게 이 상을 주는 통에 차기 부산 올림픽 개최 뇌물이냐는 비아냥도 받고 있다. * 정부가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정치 선전 자료로 지나칠 정도로 이용해 먹자 시인 김용택은 '''<팔유팔파>'''라는 시를 지어 이를 비판했다. 팔육팔팔의 오타가 아니고 진짜 제목이 팔유팔파다. 아래 내용은 그 중의 일부다. 과장된 내용 같지만 진짜 저렇게 [[1986 서울 아시안 게임|팔육]]팔팔이 한국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처럼 선전해댔다. >얘야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우리덜은뭐시그리좋다냐소값이나쌀값이나객지서노동일허는니동생임금이라도올라간다냐……그나저나오림픽이끝나며는저텔레비전속사람들이나왼갖치사와축사속의사람덜은무신소리로안정된선진조국과정의복지를위하여침을튀길까그러고우리덜은무신재미로살끄나무신희망으로와와절망하끄나. 해가떠도오림픽달이떠도오림픽빚이져도오림픽소값개값되어야도오림픽죽으나사나오림픽인디아아아아아그때는참말이제무슨절망으로아아대한민국아아대한민국허여무신재미로살끄나……그나저나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그누구의말대로거시기뭣이냐민족사의왼갖질곡과시련을극복하여그종지부를꽉찍을까그럴까우리하늘이저쪽끝에서저쪽끝까지훤하게갤까 * 서울 올림픽에 관련된 지명들이 [[서울특별시]] 시내에 여럿 남아 있다. [[올림픽대로]], [[올림픽대교]], [[올림픽공원(서울)|올림픽공원]], [[송파구]] [[오륜동(서울)|오륜동]], [[올림픽선수기자촌]], [[올림픽로]],[* 올림픽 주경기장에서부터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잇는 도로. [[테헤란로]]에서 이어지며,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울 지하철 8호선|8호선]]이 이 도로 지하를 달린다.] 88올림픽고속도로 등. 88올림픽고속도로는 대구와 광주를 잇는 고속도로로 물론 서울시에 위치하지는 않지만 88올림픽 유치 직후 건설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역시 서울올림픽을 기념한다는 취지로 명명되었다. 2015년 12월 22일 대격변급의 개량 공사 완료 및 4차로 확장 개통과 함께 [[광주대구고속도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한양대학교/서울캠퍼스|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내부에는 '올림픽체육관' 이란 이름의 체육관이 존재하는데, 88올림픽 당시 학교 측이 부지를 제공하는 대신 국비로 체육관을 짓기로 해 실제 올림픽 당시 경기장으로 활용되었다. 현재는 예술/체육대학 단과대 건물로 활용 중이며 교내 행사 등에 자주 사용된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단 [[서울올림픽주경기장|주경기장]],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야구장]] 등이 있는 [[서울종합운동장|종합운동장]]과 펜싱, 역도, 체조경기장 등이 있는 [[올림픽공원(서울)|올림픽공원]]이 모두 각각 잠실동과 방이동에 있다.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분구되고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당시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이 올림픽을 기념한다며 송파구의 명칭을 올림픽구로 변경하려고 추진했지만, 대부분의 지역주민들이 "5백년 역사가 담긴 많은 유적지와 송파 산대놀이, 송파 답교놀이, 송파 나루터 등으로 옛날부터 전국적으로 알려진 ’송파‘라는 이름은 구 이름으로라도 마땅히 남아있어야 한다"며 맹렬하게 반대를 해 무산된 바가 있다. 다만 송파구는 1992년부터 서울올림픽 개막일인 9월 17일을 송파구민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 당시 올림픽 기간에 추석 연휴가 겹쳤는데(9월 24~26일), 공교롭게도 30년 뒤에 [[대한민국]]이 개최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에도 설 연휴(2월 15~18일)가 겹치면서 [[대한민국]]은 자국에서 열린 두 번의 올림픽 모두 자국 최대의 명절과 함께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8년 추석 당일에는 유도의 [[김재엽]]이, 2018년 설날 당일에는 스켈레톤의 [[윤성빈(스켈레톤)|윤성빈]]이 해당 대회에서 대한민국의 2번째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렇게 명절에 올림픽이 끼면서 김재엽은 한복을 입고 시상대에 올랐고, 윤성빈은 세배 세리머니를 했다. * [[나이키]]에서 1988 서울 올림픽 30주년을 기념하여 에어 조던 3 서울을 더 드로우 방식으로 발매할 예정이다. 3월 7~8일 동안 나이키 공식 홈페이지에서 응모를 하면 되고, 3월 9일에 발표를 한다. [[대한민국]](우리나라)에서만 발매하기에 외국인들도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 바로 옆 나라에서 열린 올림픽이지만 의외로 일본에서는 이 대회가 흥하지 못했는데, 바로 개막 3일 뒤에 [[쇼와 덴노|히로히토 천황]]이 쓰러졌기 때문. 이것 때문에 일본 사회 전체가 자숙(自粛) 무드에 들어갔는데, 일본 전역의 쾌유 기원에도 히로히토는 병세가 점점 악화되며 동년 12월 12일 혼수 상태에 빠졌고, 결국 이듬해 1월 7일 결국 사망했다. * [[여의도]] [[63빌딩]] 주차장 쪽으로 가면 올림픽 때 [[한화생명|대한생명]]이 세운 성화대가 있다. * 이후 KBS스포츠국은 유튜브에 서울 올림픽 30주년을 기념하여 [[https://www.youtube.com/watch?v=cS-MZlwLqYQ|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곳곳에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자세한 건 [[88/18|항목 참고]]. * 개최 당시 기준으로 [[미승인국|UN 비회원국]]에서 열린 몇 안 되는 하계 올림픽이다. 나머지는 [[1952 헬싱키 올림픽]]과 [[1972 뮌헨 올림픽]].[* [[핀란드]]는 1955년 12월 14일에, [[독일]](당시 서독, 동독도 같은 날에 가입했다.)은 1973년 9월 18일에 각각 UN에 가입, 그리고 [[대한민국]]은 [[북한]]과 같은 날 1991년 9월 17일에 UN에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 2019년에 공개된 외교 문서에 따르면 "중국이 서울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단을 열차에 태워 대한민국에 보내려 했으나, 북한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중국 외교관의 증언이 나왔다. 중국 선수단이 열차편으로 서울에 오려면 북한을 경유해야 하는 건 둘째치고, 남북간 철도 연결 자체도 안된 상황이라서 애초부터 중국이 무리수를 둔 것. [[경의선]]의 휴전선 인근 복원 사업은 서울올림픽 이후 약 14년이 지난 2002년 9월에 와서야 실현되었다. *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학생 시위를 이유로 개최지를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 의회에서 제기됐고, 당시 우리 정부가 이 같은 주장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것으로 [[https://n.news.naver.com/article/421/0004554248|드러났다.]] * 통상 올림픽은 개최지 이름을 먼저 표시하는 것이 관례이다. 런던 올림픽, 평창 동계 올림픽 등. 그러나 웬일인지 86 서울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은 유난히도 대중들 인식이나 매체에서도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과 같이 개최지를 빼고 말하거나 아예 "아시안게임", "올림픽" 식으로 고유명사화하는(ex: "올림픽 때 굴렁쇠 소년이...") 경우가 많다.[* 이는 2002년 [[한일월드컵]]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는 당시 5공 정권이 "86 88"이라고 아주 세뇌하듯 홍보전을 해댔기 때문으로, 위 문단의 김용택의 시도 그런 세태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 시대 살던 사람들에게 "팔육팔팔 꿈나무"라는 말은 매우 익숙한 표어이기도 하다. * 서울종합운동장이 준공된지 30여 년이 지나 노후화됨에 따라 리모델링을 통해 새로운 국제교류복합지구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2023년부터 공사에 들어간다. * 미사리 한강 조정 카누 경기장에서 열린 남자 [[조정(스포츠)|조정]]경기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이 금메달을 획득했는데,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답시고 서로를 한강에 내동댕이치며 놀다가 다비데 티차노(Davide Tizzano) 선수가 도중 물에 빠지면서 '''금메달을 물 속에서 잃어버렸다(...).'''[[https://imnews.imbc.com/replay/1988/nwdesk/article/1814233_29513.html|#]] 그래도 [[서울지방경찰청|서울시 경찰국]]은 경찰과 119 수난구조대 등을 투입해 하루 만에 찾아주긴 했다. 메달을 잃어버린 선수는 경찰에 "내가 여자였다면 당신들에게 키스(...)를 해주었을 텐데요"라고 기쁨을 표현했다고 한다. * [[수리남]] (수영 금메달), [[지부티]] (육상 동메달), [[네덜란드령 안틸레스]] (요트 은메달),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요트 은메달), [[인도네시아]] (양궁 은메달), [[코스타리카]][* 재미있게도 코스타리카에서 88 올림픽 때 메달을 딴 선수들은 모두 [[니카라과]] 출신이다.] (수영 메달 2개), [[세네갈]] (육상 은메달)이 올림픽 첫 번째 메달을 획득했다. * 이 대회 올림픽 메달리스트 중 여자 필드하키 종목에서 은메달을 딴 김순덕은 이후 1999년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로 아들이 요절하는 아픔을 겪었고, 무성의한 정부 대책에 항의하며 자신이 딴 메달과 훈장을 모두 반납하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 [[축구]] 종목에 의외로 많은 스타 플레이어가 쏟아져 나왔는데, [[호마리우]]를 비롯해 [[베베토]], [[위르겐 클린스만]], [[토마스 헤슬러]], [[치로 페라라]], [[잔루카 팔리우카]] 등 유명 선수들이 출전했다. * 서울올림픽 관련 각종 공식 사진 및 영상 자료는 지금도 [[https://library.kspo.or.kr/index.do|서울올림픽지료실]]이라는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